
선수의 인스타그램은 보통 밝은 사진과 짧은 근황으로 채워집니다. 경기장 밖에서도 “괜찮다”는 표정을 유지해야 하는 직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끔, 그 밝음이 무너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번에 르윈 디아즈가 올린 장문의 글은 바로 그 순간에 가까웠습니다. “경찰과 끝까지 간다”는 문장은 분노의 과장이 아니라, 더 이상 가족을 ‘개인적으로 참고 넘길 수 없는 단계’에 들어섰다는 고백처럼 들립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유명하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고. 팬이 많으면 관심도 많고, 관심이 많으면 과한 말도 따라온다고. 하지만 그 말은 늘 가장 약한 사람에게 비용을 전가합니다. 선수 본인은 경기장에서 방어라도 할 수 있지만, 그의 아내와 가족, 반려동물은 경기장이 아닌 삶의 공간에서 공격을 받습니다. 그들에게는 유니폼도, 팬들의 환호도, 그 어떤 “직업적 보호막”도 없습니다. 그래서 디아즈의 글은 ‘선 넘지 말라’는 경고 이전에, “가족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더 이상 정상으로 취급하지 말아 달라”는 요청으로 읽힙니다.
침묵이 길었던 까닭
디아즈는 원래 이런 일에 대응하거나 신고하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했습니다. 이 대목은 단순한 성격 설명이 아니라, 많은 피해자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선택의 부담을 보여줍니다. 신고를 하면 일이 커지고, 일이 커지면 가족이 더 노출될까 두렵습니다. 대응을 하면 상대가 더 자극을 받아 집착이 커질까 무섭습니다. 침묵을 하면 당장은 조용해지지만, 침묵이 길어질수록 가해자는 “해도 되는 일”로 착각합니다. 결국 피해자에게 남는 건 두려움과 계산뿐입니다.
특히 스포츠 선수의 가족은 더 취약합니다. “팬서비스”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사생활의 경계가 쉽게 흐려지기 때문입니다. 온라인에서의 악성 DM이 처음부터 폭발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작은 무례가 반복되며 선을 넘습니다. 처음엔 ‘싫은 말’ 수준이었다가, 점점 협박이 되고, 끝내 성적 모욕이 됩니다. 디아즈가 “역겨운 수준의 일이 반복된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아마도 그 반복이 일상을 침식했기 때문일 겁니다. 일상은 스포츠보다 길고, 그 긴 시간 동안 가족이 겪는 불안은 어느 순간 임계점을 넘습니다.
그리고 그 임계점은 대개 한 가지 사건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협박, 성희롱, 집 앞 방문, 반려견까지 겨냥한 위협 같은 것들이 겹치면, “참는 게 가족을 지키는 길”이라는 믿음이 무너집니다. 디아즈가 이제야 공개적으로 칼을 빼 든 이유는, 참아왔기 때문에 더 무겁게 다가옵니다. 오래 참았다는 말은 ‘약했다’가 아니라 ‘그만큼 지키려 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DM가 폭력이 되는 순간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일은 현실보다 가볍게 취급되기 쉽습니다. “말로만 그랬다” “장난이었다” “DM 하나 보냈을 뿐이다” 같은 변명은 늘 비슷합니다. 하지만 성희롱과 협박은 매체가 무엇이든 폭력입니다. 특히 가족을 향한 성적 모욕은 상대를 인간이 아니라 대상화된 물건으로 만들고, 그 순간 피해자는 집에서도 안전하지 않다는 감각을 갖게 됩니다. 집이라는 공간이 흔들리면 삶 전체가 흔들립니다.
디아즈의 메시지가 중요한 이유는, 그가 “유명 선수라면 감수해야 한다”는 인식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이 거부는 단지 한 선수의 감정 표출이 아니라, 프로 스포츠가 오랫동안 방치해온 문제에 대한 정면 선언입니다. 팬 문화는 열정으로 움직이지만, 열정이 언제나 선을 지키는 건 아닙니다. 열정이 집착으로 변하는 순간, 팬은 스스로를 ‘특별한 사람’으로 착각하기 시작합니다. 답장을 받아야 하고, 얼굴을 봐야 하고, 접근할 권리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 믿음은 상대의 동의가 없다는 사실로 인해 바로 폭력이 됩니다.
온라인 폭력의 무서움은 익명성보다 지속성에 있습니다. 한 번의 욕설보다, 매일 도착하는 메시지가 더 사람을 망가뜨립니다. “오늘도 올까”라는 불안이 자리를 잡는 순간, 피해자는 이미 지친 상태가 됩니다. 그리고 그 지침은 가족 전체로 번집니다. 배우자는 멀쩡한 척해야 하고, 선수는 훈련과 경기에서 집중해야 하고, 집은 계속 흔들립니다. 디아즈가 “이제 안 참는다”라고 말한 것은, 바로 그 지속성을 끊겠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응원과 집착의 경계선
많은 팬들은 선을 지킵니다. 경기장 안에서 응원하고, SNS에서는 축하를 보내고, 멀리서 지지합니다. 문제는 일부가 그 선을 넘을 때, 전체 문화가 함께 흔들린다는 점입니다. 집 앞을 찾아가고, 초인종을 누르고, 밤늦게 사진을 찍고, ‘팬서비스’를 요구하는 행위는 응원이 아니라 침입입니다. 가족의 삶을 무대로 삼는 순간, 그것은 스포츠를 사랑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람을 소유하려는 방식이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선을 넘는 사람은 대개 자신이 선을 넘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팬이니까” “좋아하니까” “보고 싶으니까”라는 말은 동의를 대체할 수 없습니다. 응원의 핵심은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고, 존중의 핵심은 거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선수와 가족이 공개하는 정보는 선택의 결과입니다. 그 선택을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는 의무로 바꿔버리면, 팬의 사랑은 폭력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디아즈의 강경 대응은 단순한 개인 사건이 아니라, 기준선을 다시 그리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그런 사람도 있다”로 넘어갔던 일을 “범죄로 다룰 수 있다”로 옮겨놓았습니다. 물론 법적 절차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최소한 한 가지는 분명해집니다. 가족을 겨냥한 성적 모욕과 협박은, 응원 문화의 일부가 아니라 사회가 제지해야 할 폭력이라는 사실입니다.
결론
디아즈가 “경찰과 끝까지 간다”고 말한 장면은 누군가를 처벌하자는 선언이기 이전에, 가족을 지키겠다는 선언처럼 들립니다. 유명 선수의 삶은 공개된 영역이 넓지만, 공개된 것과 침범 가능한 것은 다릅니다. 그리고 그 차이를 지켜주는 것이 성숙한 팬 문화의 최소 조건입니다.
이번 사건이 남기는 감정은 분노보다도 피로감에 가깝습니다. 피해를 겪는 쪽은 오래 참다가 결국 공개적으로 나서야 하고, 공개적으로 나서면 또다시 논쟁의 대상으로 올라갑니다. 그 과정에서 가장 보호받아야 할 가족은 계속 노출됩니다. 그래서 더더욱, 우리는 “왜 이제야?”가 아니라 “여기까지 오게 만든 것이 무엇이었나”를 먼저 봐야 합니다. 참는 시간이 길었다는 건, 그만큼 일상이 이미 흔들렸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디아즈의 선택이 의미 있는 이유는, 경계를 말로만 그리지 않고 행동으로 그리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응원은 선수의 삶을 지배하는 권리가 아닙니다. 팬심은 가족의 안전을 시험하는 면허가 아닙니다. 이번 공개 경고가 누군가의 ‘이 정도쯤이야’를 멈추게 한다면, 그 멈춤은 야구의 품격을 지키는 일이기도 합니다. 경기장에서는 뜨거워도, 삶의 공간에서는 서로를 지켜주는 선이 필요합니다. 그 선이 있을 때, 우리는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스포츠를 좋아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