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림픽이 ‘정치로부터의 안전지대’라는 말을 붙잡고 살아남아 온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전 세계가 한 공간에 모이는 만큼, 대회는 갈등을 흡수하기보다 차단하는 쪽을 선택해 왔다. 하지만 그 선택이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우크라이나 스켈레톤 선수 블라디슬라프 헤라스케비치가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사진이 담긴 ‘추모 헬멧’을 쓰고 경기에 나서려 했다는 이유로 출전 금지를 당했다는 소식은, 올림픽이 지키려는 중립이 무엇을 보호하고 무엇을 밀어내는지 다시 묻게 만든다. 추모는 원래 가장 개인적인 감정인데, 그 감정이 규정의 언어로 ‘시위’나 ‘선전’으로 분류되는 순간, 중립은 갑자기 차갑고 날카로운 칼이 된다.
보도에 따르면 IOC는 헤라스케비치가 선수 표현의 자유 지침을 준수하지 않았다며 참가를 금지했다. 그는 연습 주행부터 전쟁에서 희생된 우크라이나 스포츠 선수 24명의 이미지가 새겨진 헬멧을 착용했고, IOC는 이를 올림픽 헌장 제50조 위반으로 통보했다. IOC는 추모 완장 착용은 허용하겠다는 절충안을 제시했지만, 그는 헬멧을 고수했다. 커스티 코번트리 IOC 위원장까지 현장을 찾아 설득했으나 입장은 바뀌지 않았고, 결국 경기 시작 45분 전에 출전 자격이 박탈됐다. 이 순서를 따라가면, 이 사건의 핵심은 ‘누가 옳냐’라기보다 ‘어떤 경계선이 어디에 그어져 있냐’로 보인다. 그리고 그 경계선이 지금처럼 그어져도 되는지, 의심이 남는다.
올림픽의 중립 규정이 만들어낸 역설
올림픽 헌장 제50조는 경기장과 시설, 기타 모든 지역에서 어떤 종류의 시위나 정치적, 종교적, 인종적 선전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규정한다. 문장만 보면 명확하다. 문제는 그 문장이 현실에서 ‘무엇’으로 번역되느냐다. 헤라스케비치의 헬멧에는 특정 정당의 구호도, 선동 문구도, 상대를 직접 겨냥한 문장도 아니라 ‘희생자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고 전해진다. 물론 전쟁 자체가 정치적 현실이기 때문에, 누군가는 그 이미지가 정치적 메시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역설이 생긴다. 전쟁이 정치라면, 전쟁의 피해자를 추모하는 행위도 자동으로 정치가 되어버린다. 그렇게 되면 추모는 어디에도 설 자리가 없다. 중립을 강조할수록, 전쟁의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가장 먼저 ‘규정 위반’으로 처리된다.
올림픽이 주장하는 중립은, 표면적으로는 모두에게 동일한 잣대다. 하지만 현실에서 동일 잣대는 동일한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다. 평온한 시기에 참가하는 선수에게 ‘표현 금지’는 큰 손실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전쟁을 겪는 국가의 선수에게는, 침묵이 곧 현실 부정처럼 느껴질 수 있다. 이때 중립은 공평하게 적용되는 규정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에게만 훨씬 더 큰 대가를 요구하는 규정이 된다. 규정은 같은데 고통의 무게가 다르다면, 그 규정이 만들어내는 체감은 결코 같을 수 없다. 그 체감의 차이를 무시하는 순간, 올림픽의 중립은 ‘갈등을 막는 기술’이 아니라 ‘고통을 지우는 기술’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특히 ‘경기장, 시설 또는 기타 모든 지역’이라는 표현은 중립이 공간의 경계를 넘어 선수의 존재 자체를 통제하는 방식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인상을 준다. 선수는 경기장 밖에서도 올림픽의 규정 아래에 놓이고, 올림픽 기간의 도시 전체가 사실상 규정의 연장선이 된다. 그런 구조에서는 선수의 추모 행위가 경기력과 별개로 평가받고, 그 평가는 곧 출전권이라는 가장 큰 권리로 연결된다. 중립을 지키기 위해 선수의 출전을 막는 선택이 과연 중립을 강화하는지, 아니면 중립이라는 이름으로 ‘표현의 비용’을 선수에게 전가하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완장만 허용한 절충안의 한계
IOC가 제시한 절충안은 “추모 완장은 괜찮지만 헬멧은 안 된다”는 형태였다. 겉으로는 합리적 타협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타협은 ‘무엇이 추모인가’보다 ‘어떤 형태의 추모가 통제 가능한가’에 더 가까워 보인다. 완장은 작고, 눈에 덜 띄고, 방송 화면에서 강조되지 않을 수도 있다. 반면 헬멧은 경기 장비의 중심이고 카메라가 따라붙는 대상이다. 결국 절충안의 기준은 감정의 진정성이나 피해의 무게가 아니라, 노출의 크기와 메시지의 파급력에 맞춰져 있는 셈이다. 그렇게 되면 추모는 진심의 표현이 아니라, 규정이 허용하는 최소 단위의 ‘허가된 표정’으로 축소된다.
더구나 스켈레톤 같은 종목에서 헬멧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선수의 얼굴을 대신하는 상징이다. 선수는 헬멧을 쓰는 순간 익명화되고, 그 익명화 속에서 오로지 기록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헤라스케비치가 하필 헬멧을 선택했다면, 그 선택은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현실에서 왔는지”를 지우지 않으려는 방식일 수 있다. 완장으로 대체하라는 제안은 바로 그 지점을 놓친다. 완장은 몸의 한쪽에 붙는 표시지만, 헬멧은 선수의 존재와 직결된 정체성의 표면이다. 추모가 허용되더라도 ‘정체성의 자리’에서는 금지된다는 메시지는, 추모를 허용하는 듯하면서도 실제로는 가장 본질적인 표현을 차단하는 방식이 된다.
또 하나의 의심은 절차의 시간감이다. 경기 시작 45분 전에 출전 금지 결정이 내려졌다는 대목은, 규정 준수의 문제를 ‘경기 직전의 충격’으로 바꿔버린다. 물론 설득 과정이 있었고, 선수도 고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늦은 시점의 결론은 선수의 준비를 무너뜨리고, 대회가 선수에게 제공해야 할 최소한의 예측 가능성을 훼손한다. 규정이 중요할수록, 적용 방식은 더 정교하고 일관되어야 한다. 막판 통보는 규정의 권위를 세우기보다, 규정이 권력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규칙이 인간을 이기지 않게 하려면
올림픽이 정치적 구호를 경기장에 들이지 않겠다는 원칙 자체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원칙이 사람을 다루는 방식에는 선택지가 있다. 전쟁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행위를 ‘정치적 선전’과 같은 범주로 처리하는 순간, 올림픽은 스스로에게 불가능한 과제를 부여한다. 세계가 완전히 비정치적인 공간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불가능을 선수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방식으로 해결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은 갈등을 사라지게 하는 게 아니라, 갈등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데 그친다. 보이지 않게 된 갈등은 더 깊게 쌓이고, 어느 순간 다른 형태로 터져 나온다.
그래서 나는 이 사건의 핵심이 “표현을 허용하느냐 금지하느냐”의 이분법이 아니라, “무엇을 어떤 기준으로 해석하느냐”의 문제라고 본다. 같은 이미지라도 누군가는 이를 추모로 읽고, 누군가는 정치적 메시지로 읽는다. 그렇다면 올림픽은 ‘해석의 여지’를 인정하는 장치를 가져야 한다. 예컨대 폭력 선동,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 직접적 정치 캠페인처럼 명확한 선전과, 희생자 추모처럼 인간의 보편적 감정에 가까운 표현을 구분하는 세분화가 필요하다. 제50조를 방패처럼 휘두르는 대신, 제50조가 무엇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지부터 다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선수에게 요구되는 ‘표현의 형식’을 일률적으로 정하면, 표현의 실질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는다. 완장 허용은 최소한의 배려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배려가 선수에게 “이 정도로만 슬퍼하라”는 지시로 들릴 때 오히려 상처가 커진다. 올림픽이 정말로 평화를 말하고 싶다면, 전쟁 피해자의 슬픔을 ‘노출 관리’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순간 그 말은 설득력을 잃는다. 평화는 침묵으로만 유지되지 않는다. 때로는 슬픔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때, 평화라는 가치가 더 분명해진다.
마지막으로, 우크라이나 루지 대표팀이 무릎을 꿇고 하얀 헬멧을 들어 올려 헤라스케비치를 응원했다는 장면은 이 논란이 단지 한 선수의 고집이 아니라 공동체적 감정의 문제라는 걸 보여준다. 어떤 표현을 금지한다고 해서 감정이 사라지지 않는다. 감정은 다른 형태로 우회한다. 우회가 반복되면, 규정은 더 촘촘해지고 표현은 더 교묘해지며, 올림픽은 본래 피하려던 정치적 긴장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게 된다. 규정이 갈등을 막기 위해 존재한다면, 규정은 갈등을 키우지 않는 방식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결론
나는 이 사건을 보며, 올림픽이 지키려는 중립이 결국 ‘누구의 현실을 지우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지 않은지 계속 의심하게 된다. 추모 헬멧은 누군가에게는 정치적 메시지일 수 있지만,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삶의 조각들을 잃고도 경기에 서야 하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붙잡을 수 있는 최소한의 표식일 수 있다. 그 표식을 규정 위반으로 처리하는 순간, 올림픽은 “경기만 하라”는 말을 넘어 “너의 현실을 들고 오지 말라”는 말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은 선수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특히 전쟁을 겪는 사람에게 현실은 장비보다 더 밀착된 것이다.
내 생각에 올림픽이 정말로 갈등을 줄이고 싶다면, 금지의 선을 더 굵게 긋는 것이 아니라 해석의 기준을 더 섬세하게 만들어야 한다. 무엇이 선동이고 무엇이 추모인지, 무엇이 혐오이고 무엇이 애도인지, 무엇이 캠페인이고 무엇이 기억인지에 대해 더 명료한 언어가 필요하다. 지금처럼 모든 것을 한 문장에 밀어 넣으면, 가장 먼저 걸러지는 것은 대개 가장 약한 쪽의 목소리다. 그 목소리를 막는 방식으로 유지되는 중립은 오래 가지 못한다. 중립이 권위가 되려면, 중립은 감정을 삭제하는 장치가 아니라 감정을 품어도 폭발하지 않게 하는 질서여야 한다.
결국 이 사건은 올림픽이 정치와 거리를 두려다 인간과 거리를 두게 되는 순간을 보여준다. 규칙은 필요하지만, 규칙이 인간을 이기게 두면 규칙은 목적을 잃는다. 출전 금지라는 결론이 남긴 공백은 단지 한 선수의 레이스가 아니라, 올림픽이 스스로 말해 온 ‘평화’라는 단어의 설 자리가 얼마나 좁아졌는지를 드러낸다. 나는 올림픽이 그 공백을 방치하지 않았으면 한다. 추모가 금지되는 대회는 안전해 보일 수는 있어도, 결코 건강해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진출처 - https://www.newsis.com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