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1 입문자분들이 흔히 하는 오해가 있습니다.
"오늘 경기 누가 이겼어? 페르스타펜? 아, 그럼 끝난 거네."
하지만 F1 찐 팬들의 반응은 다릅니다.
"와, 페르스타펜이 이겼지만 2등이랑 점수 차가 5점밖에 안 줄어들었어! 다음 경기에서 리타이어 한 번이면 역전이다!"
F1은 24편의 영화가 아니라, 24부작 드라마입니다. 1화(개막전)부터 24화(최종전)까지 이어지는 스토리가 있습니다. 오늘은 한 경기, 한 경기의 결과가 어떻게 나비효과가 되어 연말의 챔피언을 만드는지, '시즌 챔피언십(Championship)'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1. 티끌 모아 태산: 포인트 시스템의 미학
F1의 모든 것은 '점수(Point)'로 귀결됩니다.
1등은 25점, 2등은 18점, 3등은 15점... 그리고 10등(1점)까지만 점수를 줍니다. 11등부터는 0점입니다.
이 점수가 1년 내내 누적됩니다.
어떤 선수는 초반에 연승해서 도망가고, 어떤 선수는 차근차근 2등, 3등을 하며 쫓아갑니다. 그러다 선두가 사고로 0점을 받는 순간, 순식간에 순위가 뒤집힙니다.
이 '누적의 미학' 때문에 우리는 응원하는 선수가 1등을 못 하더라도 "괜찮아, 4등이라도 해서 12점 챙기자!"라며 끝까지 경기를 지켜보게 됩니다.
2. "지난여름,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
같은 반 친구와 1년 내내 싸운다고 생각해 보세요. 감정이 쌓일 수밖에 없습니다.
3라운드에서 A 선수가 B 선수를 밀어버렸습니다. B 선수는 벼르고 있다가 10라운드 홈경기에 가서 A 선수의 앞길을 막아버립니다.
단발성 경기라면 그냥 "비매너네" 하고 끝나겠지만, 시즌제이기 때문에 "이건 복수전이다"라는 서사가 생깁니다. 해설자들도 "아, 5개월 전 그 사고를 아직 잊지 않았군요!"라며 흥분합니다. 이 질긴 악연(Rivalry)을 따라가는 것이 F1의 진짜 재미입니다.
3. 1등보다 치열한 '4등 싸움'
많은 분이 1등 싸움만 보지만, 사실 F1의 백미는 중위권 팀들의 '상금 전쟁'입니다.
팀 순위(컨스트럭터 챔피언십)에 따라 시즌 종료 후 받는 배당금이 수백억 원씩 차이 납니다.
그래서 꼴찌 팀이 기적적으로 10등을 해서 1점을 따내면, 마치 우승한 것처럼 서로 부둥켜안고 웁니다. 그 1점 때문에 내년 팀 운영비가 달라지거든요.
시즌 후반부로 갈수록 "제발 1점만!"을 외치는 하위권 팀들의 처절한 생존 경쟁은 한 편의 휴먼 다큐멘터리입니다.
4. 모든 것이 결정되는 마지막 날 (The Finale)
이 모든 드라마는 12월 마지막 경기, '아부다비 그랑프리'를 향해 달려갑니다.
2021년 시즌처럼,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두 선수의 점수가 동점인 영화 같은 상황도 벌어집니다.
1년 동안 지구 20바퀴를 돌며 싸웠는데, 결국 마지막 한 경기에서 누가 먼저 들어오느냐로 챔피언이 결정되는 순간. 그 압도적인 긴장감은 시즌 전체를 지켜본 팬들에게만 주어지는 최고의 보상입니다.
5. 글을 마치며
지금 F1에 입문하신다면, 당장의 경기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마세요.
"지금은 지고 있지만, 후반기 업데이트 때 두고 보자."
이런 마음으로 긴 호흡의 드라마를 즐겨보세요. 넷플릭스 드라마보다 더 각본 없는 드라마가 매주 주말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F1을 1년 정도 보고 나니 신기한 일이 생겼습니다. 축구나 야구를 보는데 예전과는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 겁니다.
"저 감독은 왜 저런 전략을 썼지?", "지금 분위기가 바뀌는 타이밍인데?"
F1이 제 스포츠 관람의 눈(Insight)을 완전히 업그레이드해 준 것이죠.
다음 글에서는 [F1 입문 13일차] F1을 보기 시작한 뒤, 다른 스포츠 보는 방식도 달라졌다: 확률과 맥락을 읽는 눈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체육 전공 F1 팬, '스포츠가 좋아요'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