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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 입문 4일차] "어차피 추월하면 되잖아?" 천만의 말씀. 출발 순서(그리드)가 승패의 90%인 이유

by rootingkakao 2026. 1. 9.

F1 입문 초기,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2시간 동안 300km를 달리는데, 굳이 맨 앞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나? 실력이 좋으면 뒤에서 다 추월하고 1등 하면 되지."

영화나 만화에서는 항상 주인공이 꼴찌에서 시작해 기적 같은 역전승을 거두니까요. 하지만 F1 생중계를 보면서 제 환상은 산산조각 났습니다. 분명히 내 응원 선수의 차가 더 빠른데, 앞차를 30바퀴째 추월하지 못하고 꽁무니만 쫓아다니다가 경기가 끝나버린 것입니다.

왜 F1에서는 추월이 그토록 어려울까요? 왜 해설자들은 "토요일 예선이 사실상 결승전"이라고 말할까요? 오늘은 그 잔인한 공기역학의 비밀을 파헤쳐 봅니다.



F1 스타팅 그리드 폴 포지션의 시각적 이점과 클린 에어의 중요성

1. 보이지 않는 벽: '더티 에어(Dirty Air)'

F1 머신은 공기를 이용해 차를 땅바닥에 짓누르는 힘(다운포스)으로 코너를 돕니다. 그런데 앞차가 지나간 자리는 공기가 마구 헝클어져 있습니다. 마치 배가 지나간 뒤에 물살이 요동치는 것과 같습니다. 이를 '더티 에어'라고 부릅니다.

뒤따라가는 차는 이 헝클어진 공기를 맞게 됩니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생깁니다.

  • 다운포스 실종: 차가 땅에 붙지 못하고 미끄러집니다. 코너를 빠르게 돌 수 없습니다.
  • 엔진 과열: 뜨겁고 불안정한 공기가 들어와 엔진과 브레이크를 식히지 못합니다.
  • 타이어 마모: 차가 미끄러지니 타이어가 지우개처럼 갈려 나갑니다.

즉, F1에서는 "앞차 뒤에 바짝 붙는 것만으로도 내 차는 망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뒤에서 출발하면 아무리 차가 빨라도 추월하기가 지옥처럼 힘든 것입니다.


2. 1등 자리의 특권: '폴 투 윈(Pole to Win)'

예선 1등을 해서 맨 앞자리(Pole Position)를 차지한 선수는 왕의 특권을 누립니다. 바로 '클린 에어(Clean Air)'입니다.

아무도 밟지 않은 깨끗한 공기를 마시며, 타이어 관리도 내 마음대로, 주행 라인도 내 마음대로 그리며 달릴 수 있습니다. 방해물이 없으니 자기 차의 최고 성능을 100% 발휘합니다.
통계적으로 폴 포지션에서 출발한 선수가 우승할 확률은 40~50%에 달합니다. (모나코 같은 좁은 서킷은 거의 80%입니다.) "토요일 예선 1등이 일요일 우승의 절반을 먹고 들어간다"는 말이 과장이 아닙니다.


3. 운명의 3초: 오프닝 랩 (Opening Lap)

뒤에서 출발하면 추월도 어렵지만, 더 무서운 것은 '사고 위험'입니다.
출발 신호가 떨어지고 첫 번째 코너(Turn 1)까지 20대의 차가 한꺼번에 몰려듭니다. 이때 중간이나 뒤쪽 그룹은 병목 현상 때문에 서로 부딪히고 날아가고 난리가 납니다.

하지만 맨 앞줄(1, 2, 3번 그리드)은 이 아수라장에서 자유롭습니다.
"사고에 휘말리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선수들은 기를 쓰고 앞줄에 서려고 하는 것입니다.


4. "비켜! 제발 비켜!" 답답함의 미학

제가 응원하는 선수가 예선을 망쳐서 10등에서 출발한 적이 있습니다. 차 성능은 우승권인데, 앞의 9등, 8등 차들이 길을 막고 있으니(블로킹) 속도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직선 구간에서 추월하려고 하면 앞차가 교묘하게 라인을 막고, 코너에서는 더티 에어 때문에 미끄러지고... 결국 1시간 30분 내내 앞차 뒤만 졸졸 따라다니다가 7등으로 끝났습니다.
그날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F1은 예선이 망하면 본선도 망하는구나."


5. 글을 마치며

이제 여러분은 왜 금요일 연습 주행 때부터 팀들이 "차가 미끄럽다", "그립이 없다"라며 예민하게 구는지 이해하실 겁니다. 토요일 예선에서 단 한 계단이라도 앞서야, 일요일 지옥 같은 더티 에어를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F1 경기를 보실 때는 '출발 그리드'를 유심히 보세요.
"저 3번 선수가 1번 선수의 더티 에어를 뚫고 추월할 수 있을까?" 이것이 F1 관전의 핵심 포인트입니다.

자, 이제 F1 시스템은 완벽히 이해했습니다. 이제 진짜 '내 편'을 정할 시간입니다. 축구에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가 있듯, F1에도 전통의 명가와 신흥 강호가 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F1 입문 5일차] F1을 이해하게 만든 진짜 주인공은 엔진이 아니라 '타이어'였다 로 찾아뵙겠습니다.

지금까지 체육 전공 F1 팬, '스포츠가 좋아요'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