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1 입문 초기, 저는 선수들이 서로 헬멧을 쓰고 있길래 철저한 '개인전'인 줄 알았습니다. 같은 팀 동료가 있으면 서로 도와가며 사이좋게 달리는 줄 알았죠.
하지만 중계를 보던 어느 날, 라디오에서 충격적인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비켜. 뒤에 있는 동료가 더 빠르다. 자리를 양보해라."
순간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1등을 달리고 있는 선수에게 비키라니요? 스포츠맨십에 어긋나는 거 아닌가?
그때 알았습니다. F1은 드라이버의 개인 우승보다 '팀의 승리'가 먼저인, 아주 비정하고 잔인한 팀 스포츠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1. "너의 첫 번째 적은 너의 팀 메이트다"
F1 격언 중에 가장 유명한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다른 팀 선수에게 지면 핑계를 댈 수 있습니다. "쟤네 차가 우리 차보다 빠르잖아." 하지만 팀 메이트는 나와 완벽하게 똑같은 차를 탑니다.
즉, 팀 메이트에게 진다는 것은 "차가 문제가 아니라 네 실력이 부족한 거야"라는 것을 전 세계에 증명하는 꼴이 됩니다. 그래서 F1 드라이버들은 19명의 적보다 옆에 있는 1명의 동료를 이기기 위해 목숨을 겁니다.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칼을 갈고 있는 관계, 그것이 F1 팀 메이트입니다.
2. 악마의 속삭임: '팀 오더(Team Order)'
하지만 팀(Team Principal)의 입장은 다릅니다. 두 선수가 서로 싸우다가 사고라도 나면 팀은 0점을 얻습니다. 그래서 개입합니다.
(1) "Let him pass" (비켜줘라)
시즌 챔피언 가능성이 높은 '에이스' 선수를 밀어주기 위해, 다른 선수에게 희생을 강요합니다. 심지어 우승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도 "너는 점수가 안 되니, 챔피언 경쟁 중인 동료에게 우승을 양보해라"라고 지시합니다. 이를 거부하면? 재계약은 없다고 봐야죠.
(2) 전략적 희생양
때로는 한 명의 타이어 전략을 꼬아버립니다. 상대 팀 에이스의 앞길을 막는 '방패막이'로 쓰기 위해서죠.
"너의 레이스는 망쳐도 좋으니, 상대를 최대한 귀찮게 해라." 이 비정한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 F1 드라이버의 숙명입니다.
3. 1인자와 이인자 (First vs Second)
공식적으로는 "두 선수는 평등하다"라고 말하지만, 암묵적으로는 서열이 존재합니다.
- 퍼스트 드라이버 (No.1): 팀의 에이스. 연봉도 높고, 신형 부품도 먼저 받습니다. 모든 전략이 이 선수의 우승을 위해 맞춰집니다. (예: 페르스타펜, 해밀턴)
- 세컨드 드라이버 (No.2): '윙맨(Wingman)'이라고도 부릅니다. 에이스를 보좌하고 팀 포인트를 벌어오는 역할입니다. 에이스보다 빨라지려고 하면 눈치를 줍니다.
가장 슬픈 것은, 세컨드 드라이버도 어릴 때는 천재 소리를 듣던 챔피언 출신이라는 점입니다. F1이라는 괴물 같은 무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존심을 굽히고 이인자의 삶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짠하기까지 합니다.
4. "NO!" 명령 거부 (Multi 21 사건)
가끔은 드라이버의 자아가 폭발하여 팀 오더를 무시하고 동료를 추월해 버리거나, 비켜주지 않고 싸우는 '하극상'이 일어납니다. (전설적인 '멀티 21' 사건이나 해밀턴-로즈버그의 전쟁 등)
이때 무전으로 들리는 감독의 고함 소리와, 경기 후 싸늘한 시상대 분위기는 그 어떤 막장 드라마보다 재미있습니다. 팀은 머리가 아프겠지만, 팬들은 이런 '내전(Civil War)'에 열광하죠.
5. 글을 마치며
F1은 겉으로는 화려한 기술의 향연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인간의 욕망과 질투, 그리고 정치가 뒤섞인 리얼리티 쇼입니다.
이제 경기를 보실 때 같은 팀 두 대가 나란히 달린다면 긴장하세요. "과연 팀은 누구의 손을 들어줄까?", "뒤에 있는 선수는 순순히 말을 들을까?" 이 심리전을 읽는 순간, 여러분은 F1의 진짜 재미에 눈을 뜬 것입니다.
이렇게 복잡한 전략과 정치도, 하늘에서 '이것'이 떨어지면 모든 게 무의미해집니다. 바로 '비(Rain)'입니다.
완벽했던 계획이 휴지 조각이 되고, 꼴찌가 1등이 되는 혼돈의 카오스. 제가 F1에 완전히 미치게 된 계기이기도 합니다.
다음 글에서는 [F1 입문 8일차] 비 오는 날 F1을 보고 나서 완전히 빠져버렸다: 천재와 범인을 가르는 '웨트 레이스(Wet Race)'의 충격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체육 전공 F1 팬, '스포츠가 좋아요'였습니다.